아름다운 詩 856

국화가 피는 것은 (길상호)

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,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미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,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별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​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​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욍거리는 저 소리들도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,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.

아름다운 詩 2022.10.14

국화꽃 (남정림)

계절의 마디를 넘고 기다림의 긴 풀숲을 지나야 비로소 빙그레 웃고 있는 그대가 보이지요 ​ 소중한 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온다지요 오래 기다렸기에 소중해졌는지도 몰라요 귀한 것이기에 영원을 향해 떠날 때 함께 가는 꽃이지요 ​ 그리움, 외로움, 아쉬움 어린 꽃잎 속에 묻고 끝끝내 그윽한 향기로 승천하는 울 엄마꽃 ​ 늦게 피지만 오래 피기에 지상에서 아직 피지 못한 시간이 그대로부터 열리지요

아름다운 詩 2022.10.04

가을편지 (나호열)

당신의 뜨락에 이름모를 풀꽃 찾아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떨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​ 어느 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는지요 ​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죽인 발자국과 까만 논동자 같은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​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그냥 당신의 가슴에 묻어두세요 상처는 웃는다 라고 기억해 주세요 ​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만한 적막이 가득한지요.

아름다운 詩 2022.09.30

9월의 약속 (오광수)

산이 그냥 산이지 않고 바람이 그냥 바람이 아니라 ​ 너의 가슴에서, 나의 가슴에서, 약속이 되고 소망이 되면 떡갈나무잎으로 커다란 얼굴을 만들어 우리는 서로서로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​ 손 내밀면 잡을만한 거리까지도 좋고 팔을 쭉 내밀어 서로 어깨에 손을 얹어도 좋을 거야 ​ 가슴을 환히 드러내면 알지 못했던 진실함들이 너의 가슴에서, 나의 가슴에서

아름다운 詩 2022.09.14

여름 밤의 오선지 (이훈식)

높은 별자리 다 장조 바람은 여리게 ​ 성산 마루에 걸터 앉은 달빛 내려와 논배미마다 선을 긋고 ​ 떨어져 내린 별을 줏으며 마디마디 숨표를 찍던 맹꽁이 첫음을 잡는다 ​ 낮은 음에 이음줄 잡는 뻐꾸기 동구 밖 소식 전하는데 ​ 봇물 넘치는 음율에 감정 풀린 개구리 휘몰이 장단에 빠져들고 ​ 오늘도 만나지 못한 걸음에 꼬리표 달던 소쩍새는 ​ 되돌이표 없는 오선지에다 4분의 3박자 울음을 적는다

아름다운 詩 2022.08.01